들어가면서
오늘도 꽉차게 근무를 하고 집에 오니 아이들이 저녁은 다 먹었더라. 밥을 차려 줄 수가 없으니 어색하다. 오고 가는 시간을 사용하지 않다가 2주나 이렇게 보내야하고 상황에 따라 지금 이 책상을 사용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어쨌든 이 주는 일기 처럼 글을 남겨보고자 한다.
LG 전자
인프라웨어 시절 친한 동기도 떠나도 다들 LG CNS 로 향해 갈 때, Technical Evangelist 를 뽑는 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새로운 플랫폼. 마음이 설레였다. 브라우저를 가지고 차세대 통합 메신저니, UI 관련 마크업이니 등등 하면서 실패를 거듭하였고 웹킷까지 오픈되어 어려움을 겪다 보니, 뭔가 더 큰 웹 플랫폼에서는 이런 일 없이 제대로 된 것이 나오리라 기대하였었다. 당시 node.js 와 javascript 로 구성된 UI 프레임워크에 더 눈이 가있던 나는 ICE 통합 작업을 마치고 있는 내 현실이 별로였다. Activity 는 개나 주고 다시 웹으로 휠휠 날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양재 시민의숲을 지나 더 깊이 과천에 닿아 있는 그 곳으로 가게 되었다.
면접 때
면접 복장을 문의 했었다. 그냥 케쥬얼을 입고 가냐고 문의를 하였으나, 양복 입고 오세요 와 80% 유사한 답변이 왔다. 흠 양복을 입고 출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교대역 사물함에 양복을 넣어 놓고 출근을 했다. 퇴근 길에 양복 들고 서초 캠퍼스로 갔고 면접이 있던 고객센터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예전 게임 회사 인턴 때 있지도 않은 양복을 입고 면접을 갔던 적이 있다. 그 때 실장님께서 이 건물에 유일하게 양복 입은 사람이 나임을 알려주었던 그 때 생각이 나면서 그냥 웃겼다.
브라우저, 안드로이드 개발, 브루, 위피 등등 플랫폼 경험이 있다고 슬라이드를 만들어 나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나름 글도 잘 쓰고 등등 이야기를 했는데, 면접관 3분 중 1분 빼고는 관심이 없어 하시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관심 있으신 그 한분이 채용을 직접 하시는 것이고 다른 분들은 관심이 없어 하셨다. 어차피 뽑을 사람이 아니니…
원래 자리에 오시기로 하셨던 조직장님은 다른 일정이 있어 마치고 전화통화를 했었다. 인프라웨어 옥상에서 통화하냐고 잘 들리지 않았지만 연신 네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엘지전자가 당시에 입사 소개서를 쓰는 것이 정말 너무 힘들었었다. 8개 이상의 질문에 각각 천자 이상을 넣어야 하는데… 그 시스템이 IE 예전 버전만 지원해서 내 컴퓨터가 아닌 동생 컴퓨터를 겨우 빌려 퇴고 없이 그냥 냈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나를 채용한 프로젝트 리드로 부터 나는 이력서 글이 제일 잘 쓴 글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웃기고 여러 생각이 들었는 지 모른다.
어쨌든 그 분께서 면접이 끝나자마자 같이 일하자고 하였다.
당시 겪어 보지 못한 그런 따스함에 너무 놀랬다.
집으로 가는 빨간 버스에서 너무 감동하여 이 곳에는 꼭 가겠다 다짐 했다.
그 뒤 최종 면접으로 민경오 당시 연구 소장님 면접을 보았었다.
당시 실무진 면접에 통과해도 소장님 면접을 통과하는 비율이 매우 낮았다고 한다. 다들 걱정하셨는데, 너무 잘 해주셨다. 뭐 여러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영향을 받았다. 정말 잘 해주셨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룹 연수
엘지는 합격하고 나면 그룹 연수를 간다. 그게 무엇이냐면 일주일간 합숙하고 엘지의 정도경영을 배우는 것이다. 팀 과제도 있고 시험도 보고 마스게임..도 한다. 그 때 받은 체육복은 얇은 것이라 이제 없지만 회사에서 나누어준 그리고 세금은 떼어간 해지스 체육복은 아직도 종종 입는다. 뭐 다시 원래 문맥으로 돌아오면 회사에서 일하기 전에 합숙을 한다. 정말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고 정말 싫은 일이지만 당시는 어색하지 않았다.
원래 인화원에서 해야했는데, 당시 공사 중이라 수원과학대에서 했었고, 수원과학대가 때마침 축제였었어서 축제에 초대된 싸이와 함께 나도 초대되어 놀다 왔었다.
생각해보니 최종 면접이 통과 하면 건강 검진을 했었다.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채용이 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섭다. 인프라웨어까지도 건강 검진을 하고 결과에 따라 채용이 될지 안될지 결정이 되었었다.
어쨌든 엘지의 거의 처음은 가서 계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일주일간 안나온다. 거의 초반에는 책읽고 이전 결과물 보고의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그룹 연수를 온 것이었다.
겨우 마치고 회사로 복귀 하였지만 한 2주 정도 있다가 전자 연수를 떠났었다.
전자 연수
평택에 있는 공장의 러닝센터에서 일주일간 합숙을 한다. 물론 나중에 나는 이곳에 와서 강의를 많이 했었었다. 강의한 시간이 100시간이 넘었었다. 공식적으로 회사에서 등록된 강의만 따져도 말이다. 그렇게 친숙한 곳이긴 했지만 처음엔 너무 어색했다.
역시 이곳에서도 정신 개조 훈련이 있었다.
아무래도 문화를 주입하는 것이 당시 대기업들의 기본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가 4월에 입사해서 이렇게 2주간 연수를 받았지만…
당시 1월에 입사한 신입분은 5월이 되서야 처음 출근을 했던 것 같다.
경력으로 들어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신 학교라고 공장가서 조립도 해보고 행군하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내 차례가 오기 한참 전에 사라졌다.
번외 진급 연수
이 곳은 진급을 하면 또 이런 연수를 한다. 나는 그래서 인화원을 한번 갔었다. 당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곤지암 리조트에서 반은 잠을 자야만 했는데 나는 포함되지 못하였다. 당시 아내가 집에 있었고 매우 허전해 하여 전화를 저녁에 많이 하곤 했다. 지금도 하는 지 모르겠지만 큰 회사에서는 집체 교육이라고 하는 그 것을 당연히 했었고 나 역시 거부감이 없었었다.
지금 출근해서 힘들다고 징징하는 나의 상황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말 말이다.
마치며
엘지전자 서초 캠퍼스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면 참 아름다웠다. 물론 집에 가기 너무 힘든 상황이 발생하는 그런 과정 한 복판이었지만, 종종 생각이 난다. 창가에서 통화를 하면서 서울을 바라보면 그렇게 서울이 아름다웠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서울은 참 혹독하다. 다음 기간 이 집이 연장이 될지 또 이사를 가야 할지 모르는 그런 서울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엘지의 처음의 기억은 모조리 합숙이다. 모르는 사람과 친해져야했고 또 친해져야 했다. 정도경영이라는 아이디어는 참 좋았던 것 같다. 합숙은 별로 였지만 창업주의 아름다운 생각은 참 아름다웠다. 나도 방을 얻어 일하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은퇴할 때 까지 이곳에서 다녀야 하는 구나 했었는데…
지금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그립기도 하지만 새장같이 느껴지기도 하다.
재택은 되지 않았고 마지막에 재택 시켜주면 퇴직 하지 않을 거냐고 물어도 봐주시긴 했지만.. 뭐 그건 그거고 당시 유연 근무제를 처음 경험하게 한 것은 엘지 전자였다.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없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면 되고 정해진 결과를 만들면 되는 그런 일하는 방식을 배웠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 유리창가의 냉함과 그 커피머신의 따뜻함이 종종 그립다.